동창회 산악회에 대감(?)님이 좋은 글에 대해 한수 가르쳐 주셨다. 두 분은 오늘의 大선배 조선의 대감쯤 되는 선배다. 두분 분은 조선의 현감쯤 되는 선배다. 시간이 지나 나으리들은 갓대신 모자와 썬그라스를 쓴다. 그날에 나는 느꼈다. 고로, 존재했다. 동창회 산악회 슬로건이다.
참여는 사랑이다!
남도의 넓은 벌과 갯뻘 豆原땅 대감이 이런 말씀을 했다.
좋은 글은 역사와 사람 그리고 세계를 주름잡을 만한 세계관이 들어가야 된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큰 이상을 이제라도 품고 앞으로 세계는 주름 못 잡았으니 세계관이라도 주름잡고 싶다. 그 大선배님을 垈山의 류대감님으로 유대감있게 부르기로 했다.
모자를 쓴 류대감 닮은 <인디아나존스> 영화를 봐도 그렇고 <어린왕자>와 더불어 프랑스인 필독서, 프랑스 전대협(?) 소속 프랑스 대감 미셀푸코의《광기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한국 축구계에는 박지성이 있다면 프랑스 학계에 지성에는 프랑스 지성 국가대표 푸코가 있다. 한국 교육계에는 위사진 가운데 최대감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와 대감들은 갓을 썻으니 지금 나처럼 머리 빠지는 걱정은 안했겠네, 그런 생각도 해본다.
하여간, 푸코는 지층간 단절처럼 세기별로 광인(狂人 ), 시쳇말로 관심종자(觀種)나 튀는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다수가 공감하고 구별하는 기준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올림픽개막식도 세느강에서 하고 정신사납게도(?) 판타지영화처럼 개막식을 창의적으로 꾸민 문화예술의 나라 프랑스다. 프랑스 대학생 필독서가《광기의 역사》다.
易으로, 한국에 아무개 암기대학(?) 나오지 않아도 역사와 사람을 이해하는데 大卒者 못지 않는 식견을 가질 수 있는 名著다.
그 책이 한국의 풍수지리와 같이 지층ㆍ땅이야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땅에는 氣運이 있음이 자명하다.
류대감님이 살던 대산마을이 왜 큰 大를 쓰지 않고 배려하는 대신할 代 밑에 흙 土를 쓰는지... 나(我)라면 큰 大를 썻을 것이다. 글로벌(?)하게 오늘도 글로 벌한 문장(=) 반성문을 써본다.
대감님 말씀대로 역사로 남도의 현감들, 사람으로 남도의 대감들, 그리고 글로벌한 반성문 일기를 써야겠다. 오늘 일기는 두원중학교 교가와 고교시절 국어책 김태길 <글을 쓴다는 것>으로 짧게 나를 글로벌한다.
(1절) 두원땅 넓은 벌에 펼쳐진 우리~🎵
(2절) 반도꽃 갯바람에 닦아진 두원~ 🎵
두원중학교 도덕시간이다.
고흥만으로 두원면 풍류해변과 도덕면 용동해변이 연결되는 도덕면에는 도덕중학교가 있다.
《어린왕자》책에도 어른들에게는 '아파트를 평수로 설명해 주어야 금방 이해한다' 는 문장이 있다. 어린왕자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부동산 복덕방에서 올린 도덕면 용봉해변의 사진을 올려본다.
도덕중학교 도덕시간은 도덕면 고장의 역사 시간인가? 그렇게 딴 생각을 하며 나는 존재한 때도 있었다.
그날의 두원중학교 도덕시간에 누가 이런 요상한 말을 한다.
내나이 열다섯살 도덕시간에 나는 이 말을 처음들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인가? 딴 생각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소린가? 하여간, 듣도 보지도 못한 데카르트가 말했다고 한다. 금메말시 그랑가브다 했다. 긍게~긍게~할 수 없었다.
두원중학교 중간고사 시간이다. 다음 중 이 말을 한 사람을 고르란다. 뭔 말인 줄도 모르고 나는 데카르트를 골랐다. 외가에서 낳아 이름을 '外植' 이라 지은 짝꿍이 나한테 그랬다. 정답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냐? 소크라스가 생각은 제일 많이 하지 않냐?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담서~소크라테스는 밥도 안 먹고 맨날 맨날 생각만 하니 정답은 소크라테스 아니냐?
지금 생각하니 그날 도덕시간에 졸다가 깬 외식이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구나~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 외식이는 요즘엔 기아타이거즈 소크라테스가 홈런치면 그날 밥 안먹어도 배가 부른다고 한다.
중년이 넘어 <생각하는 로댕>을 다시 유심히 본다. 조각상을 보고 이렇게 나는 느낀다.
로댕은 저러고만 앉아 있으니 허리디스크는 안걸렸나? 어른 말씀하고 있는데 턱이나 바치고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방진 로댕이로세~술한잔 걸찍하게 하고 볼 때는 로댕이 축 늘어진 오댕처럼 보인다. 다리도 펴지 않으니 오댕국물에 사타구니 습진 걸린 로댕은 얼마나 간지러움을 참고 있을까 안쓰럽게 느껴진 때도 있다.
총각 때는 술기운에 딴 생각도 하련마는, 각시 있는 서방이라, '나는 딴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딴 여자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서방으로 존재한다' 를 되뇌이며 집으로 집으로 간다.
내일은 고향 가는 날이다. 유튜브를 끄고 자려는 순간, 큰학교에 한성열 대감이 이런 말씀을 한다.
이건 또 술먹고 하면 느낌 안 온다는 뜻인가? 또 무슨 말인가? 스마트폰ㆍAI가 다 해 버리는 시대에 知性人은, (知)적 호기심과 (性)적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데...性的으로 느껴야 존재한다는 말인가?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겠다.
그리고 수희누님의 이노래를 듣고 잠을 청한다.
내 자존심은 두고 떠나라~🎵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애모~🎵
를 들었는지 애무를 했는지는 술 취해 잘 모르겠다. 하여간, 코 골고 잘 잤다.
♧ 堂心存?
그리고 다음날, 남행자동차를 타고 고향집을 내려갔다. 가는 길에 조선의 고흥군청 고흥아문(衙門)을 들렀다. 아문을 들어가 본다. 현감(군수)들이 집무를 보던 집(堂)이라한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큼지막한 현판 글씨...Golfzon도 아니요, 당심존? 현감의 스크린 골프연습장 인가?
存心堂이다. 안그래도 서울에서 자존심 상한 일 많이 당한 일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놈(?)한테 당(撞)하지 말고 살라했는데, 자존심을 잃지 말고 살라는 말인가? 남자가 存心이 있어야제~ 전어맛에 안가보면 배알이 꼴려 배아파 죽을지경시라는 광양 망덕포구 배알도 배알이 있는데, 그 존심인가?
아니면 고흥포두에 비자나무숲이 아리따운 금탑사를 세운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가? 금탑사에는 아리따운 여승들만 산다는데...
예산 수덕사에는 여승들이 많건만, 인적 없는 고흥 두원가는 길 밤은 깊은데 수덕사에는 여승~🎵 만 있었다...할매여승 ! 소록도에는 간호사 천사도 살았다는데 할매천사...마르안느 & 마가렛...
■ 현감 ; 나는 다스린다, 고로 존재한다.
드디어 시골집이다. 아부지 <케비넷 역사문화박물관>에서 고흥문화원에서 발간한《고흥의 충혼과 창의倡義, 그리고 잊혀져간 일들》을 꺼내본다. 그리고 그책 308쪽에는 그가 있다. 보수언론 기자도 고종이 이사람 말만 잘 들었어도 조선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고, 한일합방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평하는 조선 최후의 영의정이자 이완용 이전에 총리대신을 역임한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 김홍집이다
6. 선한정치의 상징, 고흥현감 김홍집 선정비 12개 면에 세우다.
순천에는 고려후기 순천 팔마비(八馬碑)의 최석 승평부사가 있었다. 고려시대 馬는 오늘에 자동차다. 그것도 좋은 馬만 골라서 보냈으려니 오늘로 치자면 벤츠나 제네시스 8대를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이 얼마나 청렴한 부사(현감)인가?
광양에는 1528년 유당공원(버들못정원)을 건립한 박세후 현감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한산》에서 안성기 배우로 낯익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 광양현감 어영담 대감이 있다.
광양 大監은 大感이다. 어영담 공적비라 하지 않고 선소리(船所理) 땅이야기와 水軍의 큰 공적비 옆에 자그마한 어영담 현감 공적을 적어두었다.
光陽의 품격인가, 주인의 도덕이라 할만한 진월면 사람들의 나다움인가? 땅이 사람에게 주는 기운인가? 나도 크게 느껴본다. 흥분한다. 고로 나는 광양에서 知性人(?)으로 存在했다.
여수 율촌에는 이봉징 부사 마애비가 있다. 밤에 물리는 세금 밤세에 시달리던 율촌백성들에게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라 명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방도를 알려준 이봉징 부사가 있다. 사과 부사는 기억 못해도 밤골의 이봉징 부사는 기억해야겠다.
보성에는 이름도 현대스러운 방 씨 부인 방수진이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방진 군수(현감)이고 그녀의 서방은 장군이였는데 이름이 이순신이다.
■ 대감 ; 나는 크게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크게 느껴야 하는 것은 그것(?)만 있는게 아니다. 크게(大) 느끼고(感) 길이 남을 名作을 쓴 현대문학의 巨木 남도의 대감(大感)들이다.
광양에는 한국의 생텍쥐페리 정채봉 동화작가, 정대감이 있다. 순천에는 현대문학의 거장 위에 거목 김승옥 소설가 김대감이 있다. 순천에 있는 <정채봉관>과 <김승옥관>이 대감집 처럼 한옥집이나 초가집이다. 김승옥이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온실 속 화초라면, 장흥에는 동학에 정신이 살아 숨쉬는 야생화 이청준 소설가 이대감이 있다. 장흥 동학운동에는 내가 당시 살았다면 각시 삼고 싶은 미모의 여걸 이소사가 살았다. 오늘의 보성에는 문단의 페미니스트, 나는 한국의《제2의 성》작가 '보부아르' 로 부르고 싶은 문정희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고흥에는 따르릉~따르릉~비껴나세요~대감님(?)이 나가신다 이리오너라 ~할 만한 아동문학의 거목 목대감이 살았다. <자전거> 동요 작사 목일신 대감이다. 두원땅 넓은 벌과 뻘에는 지푸라기 감수성에 지푸라기 덤불에 별바라기였던 남도의 서정시인 송수권 大感이 살았다.
그래도 大感 중에 大感, 그날에 삼정승 대감보다 높은 관직은 내려 놓았지만 우주의 진리를 논하는 처사(處士)가 있었듯, 오늘의 남도의 처사 , 구십을 앞둔 望九나이에 병상에서 順天에서 의 학창시절을 그리며 《싹심이》책을 완성한 정영철 소설가 처사대감.
유치진 희곡작가만 알았지 정조 희극작가 고향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돼 나는 또 글로 벌한 반성문을 써본다. 탯줄터는 고흥, 책방터는 순천이였던 두형제 대감의 문학과 고향 사랑이, 나는 고향 大感글을 공감한다, 고로 나는 存在한다~는 말을 절로나게 한다.
■ 공감 ; 나는 공감한다, 고로 존재한다.
위 말을 나와 너가 몇번 모이고 돌고 돌리면, 우리는 공감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는 디지털ㆍAI시대를 살아 갈 知性人의 공식이 도출된다.
지성인이라면 느끼는 공감에 대해 공감할 만한 세계를 주름잡은 베스트셀러 3개를 소개해 보려한다.
첫째,《잠못들 정도로 재미있게 읽는 뇌》일본 뇌인지 과학자 모기게니치로 著
여름에 모기에 물려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모기교수가 쓴 책이다. 공감을 잘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공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공감을 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 안해 준다고 그 사람(마음)을 미워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 뇌를 미워해야 되겠구나~나는 그렇게 공감했던 책이다. 머리가 좋다는 의미를 전두엽의 작용에 의한 대상과 상황을 인지하는 뇌의기능, 즉 뇌과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것도 흥미롭다.
한국 현대철학의 거목 김태길님도 머리가 좋은 것과 머리가 월등히 좋은 것을 구별해야 된다고 했다. 중학교 때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배워 놓고 사회적 뇌라는 말을 흘겨 들은 것은 아닐까.
둘째,《공감은 지능이다》미국 스탠포드大 심리학자 겸 뇌과학자, 자밀 자키 著
우리사회는 얼마나 아인슈타인을 천재로 우상화하였는가? 미국의 핵개발자 <오펜하이머>영화를 보면 아인슈타인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였다.《어린왕자》와 더불어 프랑스인 교양필독서 미셀푸코의《광기의 역사》거시적 역사관으로 보면, 아인슈타인이 15세기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천재가 아니다. 수학만 잘하는 학생이거나 열등한 학생에 불과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다빈치 같이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 예술인이 머리가 좋은 천재였다. 한국은 지나치게 아인슈타인을 천재로 우상화하여 아인슈타인 같은 인적자원(?)을 교육으로 확대재생산했다. 그 15세기 기준으로는 머리가 나빴던 아이슈타인은 한국에 못가진 수많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어린아이들에게 나는 머리가 나쁜 애야~자괴감이나 상처까지 주며~소 등급판정 하듯 IQ테스트를 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한국인이 금방 알아먹을 수 있도록 번역자는 제목을《공감은 지능이다》라고 했을까? 그렇게 나는 이책을 읽으며 느꼈다. 책의 주요 내용은 공감해야 서로에게 친절, 친절해 질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느꼈다.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로 구분했을 때 공감능력은 EQ에 가깝다. 한국사회에서 통상 머리 좋다 인식되는,머리좋은 것에 대해 담론(談論)화 돼어 있는 <知能>에 대해 한국 현대철학 거목 김태길 前 서울대 교수 말을 들어 볼만하다. 관악산 강단에서 죽어있는 철학지식(지배권력)을 자신이 번 돈으로 <현실과 철학> 학당을 만들어 소위 말해 대학진학을 못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산지식으로 만든 나의멘토이다. 그 책이 김태길 著 《삶이란 무엇인가 ; 삶과 그 보람》, 그 책의 내용이다.
재능이 탁월하다고 말할 때는 주로 그 사람의 지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능이 좋다는 것은 축복 받을 일이다.
그러나, 才勝德薄 이라는 것이다.
지능이든 재능이든 지능이 높은 사람이 많은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지능은 높으나 德이 부족한(薄) 博士들이 지배권력의 못된속성에 뇌가 한쪽으로 쏠려 갇혀 산다는게 문제다. 뇌가 한쪽으로 쏠렸으니 자신이 쏠렸는지 어찌 알겠는가? 나도 쏠렸을지 모를 일이다. 김태길님의 말씀에 감히 내가 덧붙히면 才勝德搏 博士라는 것이다.
셋째,《도덕의 계보》와 《선악의 저편》니체 著
한국인 중년과 노년의 뇌가 공감을 잘 못하는 이유는 어려서 부터 뇌가 선악의 이분법으로 길들임을 넘어 가스라이팅 당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옳다 틀리다식으로 판단하는 뇌로 길들여졌다. 옮음은 善이요, 틀림은 惡이다로 길들여진 것이다. 한국인의 뇌는 공감도 좋다 싫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맞다 틀리다 합리적(?) 이라는 명분으로 인공지능(AI) 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AI시대에 可不만 있고 好不好가 없는 뇌를 AI시대 AI 조류독감 걸린 新닭가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노조일을 오랬동안 해왔다. 어떤 때는 가진자나 그들이 닭싸움을 걸어온다. 싸움이라고 보기에 명분과 실리가 없는 닭싸움에 쌈박질도 있었다.
공감하는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고 쪼아서 먹는 닭들도 보았다. 닭싸움을 걸어온다. <너무나 너무나 비인간적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닭싸움을 한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에게 힘이 됐던 것은 문소리 배우가 성우로 나오는 영화《마당을 나온 암탁》주인공 잎삭이의 지혜였다. 닭장을 나와 넓은 시야로 보고, 일단 마당으로 나오는 용기와 공감이였다. 공감의 힘이였다. 그 공감이라는 뿌리의 토양은 남도 고향이 나의 뇌에 어려서 부터 심어준 <못가진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였다. 사랑과 공감이였다.
그리고 니체는 그 공감의 원천을 노예의 도덕이 아닌 주인의 도덕에서 찾았다. 노예의 도덕으로 공감하는 것은 공감하는 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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