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고흥여행

서울로 간 두원 소와 나 ; 남파랑 두원길과 갑재민속전시관

고흥돌문어 2025. 1. 31. 00:21

얼마 전에 新동학혁명이라 할만한 일이 일어났다.
분노한 남도 농민들이 트렉터를 타고 남태령을 넘어 서울로 입성했다. 경운기를 타고 상경했으면 어땠을까, 황소를 몰고 왔으면 어땠을까

그보다 더 놀라운 만한 일이있다.
여의도 대신증권 빌딩 앞에 서있던 우람한 황소가 내고향 황소라는 것이다. 고흥군 두원(豆原)면 남도 황소라는 것이다. <마당을 나온 암닭>이라는 에니메이션영화가 있듯이 두원땅 <넓은 벌을 나온 소>다. 대신증권을 다니는 깨댕이 깨복쟁이 친구도 몰랐다는 것이다. 친구에 놀람이다.

어! 그래~정말? 진짜?

자본주의 꽃이 주식(증권)이고 증권사가 즐비한 여의도, 대한민국  금융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던 '황우상(黃牛象)' 이라 불리던 황소, 그 황소가 내고향 고흥 두원면 황소라니 어찌된 일인가?

증시활황을 영어로 Bull Market이라 한다.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 소를 사고 키우듯, 사업가는 기업을 운영하는 자금을 모으려고 주식(증권)을 발행한다.  
대신증권 창업자 전남 나주출신 양재봉 회장은 1994년에 전남대 미술대학 교수에게 황우상 조각을 의뢰했다. 황소상을 조각한 이가 바로 내고향 고흥 두원면 용산리 신월(新月), 작은 대산(垈山)마을이라고도 불렸던 신월마을 태생 김행신 교수다.

질박하고 질펀한 삶의 고향 땅을 나온 미술조각가다. 삶은 조각예술품에 묻어난다. 김태길, 김형석교수와 함께 한국철학자에 큰어른으로 꼽히는 안병욱 인생철학자, 그는 수필 <얼굴>에서 '날마다 자기의 얼굴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생활을 하자' 고 했다.

여의도에서 직장을 다녔던 때,
나는 대신증권 앞에 서있던 그 소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어! 어디서 많이 보던 황소 느낌인데~???

아버지와 함께 밭을 갈며 소 길들이는 그날이 스처간 때도 있었다.
소 길들임이다.
나이들어 알고 보니 소만 길들여진게 아니었다. 사람인 나도 소 길들임처럼 누군가에 의해 무언가에 의해 길들여졌다.
길들임(tamed)이다. 아버지는 '질들임' 이라 말했다.

소는 척박한 땅 밭을 간다.
타는 목마름에 입틀막을 당해도 끈적끈적한 논물을 헤치고 잘도 간다.

그날에 소는 처음에는 삐툴빼툴 논밭을 갈고 간다. 어느순간 부터 반듯이 오롯이 간다.
소가 뒷걸음질 칠까바 겁이 났다. 아버지는 사람이 있으면 소는 절대 뒷걸음질 치지 않으니 무서워 하지 말라하셨다
소를 믿고 줄을 잘 잡고 따라 가라고..
아버지는 그날에 말씀하셨다.  

소를 믿어라

그렇다.
길은 믿음이다.
남도향토 서정시를 대표하는 두원면 학림마을 生 송수권 시인은, 고향 두원에 바치는 헌시 <>에서 길은 믿음이요 축복이라 했다
고약한 냄세가 나는 누리장 나무 잎사귀에도 민달팽이가 지나간 흔적은 있다, 그렇게 시인은 말했다
그길은 인생길이었다.
시인은 두원땅에서 자란 사람들을 민달팽이로 상징하고 표상한 것일까, 민달팽이가 수없이 지나간 건지 비석에 세월에 흔적이 그윽하다.

두원면사무소 가는 길 두원향약(鄕約)비 약속과 믿음의 길에서

황우를 조각한 고향사람 조각가 이름도 믿음의 길이다. 구불구불 시골길이자 자전차 지나가는 술통길 두원길...
두원길은 믿음의 길 행신(行信)이었다. 무아지경이라 했던가, 두원길은 편의점도 없는 암끗도 없는 길이기도 하다.
하늘과 (갯)바람과 별과 시가 있는 길이다.

남파랑 73번길

1972년生 쥐띠인 나는 두원면 해변을 에둘러 있는 남파랑 72번길과 73번길을 걷는 테마여행도 좋겠다.
1973年은 소뛰의 해였다.
73번길을 걷다가 황우상이 생각나니 두원소를 만나라는 인연일까, 명리학 음양오행과 땅의 기운일까
송수권 시인이 별이 떨어진 곳 <두원운석> 에서 일러준 말처럼,
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말자
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말자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말자

하여간, 설명절에 부모님 산소가 있는 믿음과 축복의 두원길을 걸었다. 마을 뒤편에 뒷개라 불리던 갯길을 따라 걷는다. 대전리에서 차범근 축구감독 집이 있는 예회리를 지나 어머니 갯일하던 성두리 뒷개 찍고  용산천을 걷는다.

용산천은 갯천에서 용나던 곳이다.
황우상 김행신 교수와 황소가 살던 新月마을이 저멀리 보인다. 月자가있는 동네는 역시나 갯벌바다에서 가까운 포구가 있던 곳이다. 新月마을과 臥龍마을이다. 판소리 단가 호남가(歌)에 興陽(고흥)에 솓은 해는 寶城을 비추듯~두원가(歌)에 新月에 뜨는 달은 두원땅 넓은 벌 재너머 城頭와 大田을 비추고~별나라 금성에서 온 별(두원운석) 金星은 소가넘는 재너머 쇠재마을 金城에 드리우네~ 그렇게 노래 불러도 좋겠다.

남파랑 두원길 용산천에서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저멀리 우도(牛島)가 보인다.
사람과 소가 함께 살며 공생(共生)하던 소의 섬>쇠섬이라 불렸던 섬은 누군가의 잣대로 소를 닮은 섬, 눈요기쯤으로 볼거리 우도(牛島) 한자어로 변해버렸다. 사람과 소가 살던 소의섬에서 그들의 시각으로 소를 닮은 섬으로 변해버린것이다. 바다갈라짐으로 쇠섬을 가는 신비의 무지개다리는 우도를 가는 레인보우교(Rainbow橋)로 변해 버렸다.

예회리 맞은편 쥐섬은 쥐 서(鼠)를 써 알아먹기 어려운 '서도' 바꼈다.
지배권력 되물림을 위한 유교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한국사회가 그렇듯, 고향말로 '베래븐' 것이다. 서울 아파트 동이름에 고상한(?) 프랑스말을 붙이는 격이다. 사업가는 줄어들고 졸부는 늘어나는 한국사회의 끝판왕이다. 그런사회는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다.
고흥사람들이 이름붙인 돌로 된 독섬을 배운 선비양반들 담론(?)이 홀로 독(獨)을 차음(借音)해 저멀리 섬으로 만들어 베래븐~것과 같은 이치다. 위풍당당한 돌(독~)으로 된 독섬의 독도를 외로운섬 독도로 변질시켜 버린것이다. 독도가 한국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지배권력의 담론(談論, 헤게모니)라 했던가, 아버지와 두원소의 힘으로 간 큰학교에서 처음 들어본 담론?..
그런 요~상한 말은 처음 들어봤다.
나이들어 생각해보니 보이는 정치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라는 말 보다, 가진자들의 보이지 않는 담론이나 문화권력으로 세상을 교묘히 지배한다. 그리고 촌에서 못가진 사람들의 담론(설화)과 문화는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못배운 사람들의 이야기나 미신쯤으로 무시당해 버렸다. 촌사람 담론이 인류공통이 가지는 더 글로벌한 사람다운 것인데 말이다. 세계적 석학들이 말한 삶의 철학과 더 비슷한데 말이다.

안방에서 아버지는 댕길 行이라 한자를 읽으시고 어머니는 핵교 댕겨오니라~하시던...
나에 살던 고향에 그날이 반도 끝 추억이 득량만 갯바람과 함께 실려온다.
두원땅 넓은 벌에 거센 갯바람에 닭아진 두원소와 나, 그리고 우리었다.
산을 먹은 소였다.
두원이 품은 이상은 독수리가 창공을 날고, 두원의 순수는 염소가 풀을 뜯고, 두원의 상상력은 소가 산을 먹었다.
어떻게 소가 산을 먹었을까?

노동운동이나 힉생운동을 해본 사람은 알만한 이탈리아에 안토니오 그람시, 유럽에는 그람시가 쓴《생쥐와 산》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두원사람이 쓴《산을 먹은 소》가 있는 셈이다. 두원의 콩깎지 언덕(原) 옛이름이 영어에 언덕을 뜻하는 힐( Hill)과 관련이 있고, 두원의 옛이름이 그래서 '두힐' 이라 말하면, 사람들은 웃기고 있네라 말할까, 우연이라 말할까~

남파랑 길에서 옆길로 샌 두원 들머리에서

하여간, 유럽의 그람시는 남도의 그람시롱~이다. 그 해답을 고흥사람 김석훈이 쓴《우리말 범어(梵語)사전》을 읽고 풀어봐야겠다. 얽히고 섥힌 세계역사의 흔적이 고향말에 남은 실타레를 풀어봐야겠다. 이것이 이땅에 살았던 세계인의 말, 사람다운 古語란다.

오순택 작가는 대동마을 산에 올라 득량만 풍류(風流)마을과 월하(月下)마을 해변을 보았다고 한다. 두원의 동심 오순택 선생이다. 그의 이름이 남도 땅을 비추던 달처럼 떠오른다.
오순택, 오재동 시인 모두 같은 대동마을 집안이다. 화순의 동복 오씨에서 갈라진 두원의 토착 성씨 두원 오씨집안이다.
누에와 오이농사하던 두원 오씨 사람들이다. 고흥문화원이 발간한 《고장에 뿌리》는 '전라남도에서 최고품질의 오이는 두원오이' 였다고 썼다. 같은 집안의 대동마을 내친구 이름도 '오이'다.
아버지가 오이농사 하다 그냥 오이~라 해라~그렇게 이름지운 오이는 자식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서울아이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고흥과 두원의 동심을 읽고 자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고흥사람 시가 많다.
두원의 동심은 月下에 月心이요, 두원의 품성은 風流와 大同이라 할만하다.
그 땅의 기운은 오늘에 이르러 감성, 상상에 자유를 달게 됐다.
유자는 거꾸로도 생각해 보면 유자골이 품은 자유다.
유자는 자유다.

고흥읍 여산(麗山)길 에서

그 지푸라기 감수성의 감성과 자유가 묻어나는 땅의 흔적을 따라 두원길 에 있는 <갑재민속전시관> 을 향해 걷는다. 남파랑 73번길 끝자락에 있는 내로마을까지 가지 못하고 내 글버릇처럼 옆길로 새버렸다. 옆길로도 가봐야 여행의 묘미 우연의 발견이 나온다.
아버지가 믿던 음양오행으로 말하면, 소(73년生)가 뒷걸음질 치다 쥐(72년生)잡는 格이다. 우연히 횡재를 한 격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제는 기계 네비게이션이 일러준 길로만 간다. 기계가 일러준 편리한 길로 가지 않으면 뇌가 불편해 지도록 점점 길들여진다. 과학적 사고에 이미 갇혀버렸다. 이제는 소처럼 천천히 가질 않는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은 이제는 두원길을 슁슁~급하게도 간다.

<갑재민속전시관>은 교사로 은퇴한 갑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원운대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곳이다.
순천낙안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에 보성이 낳은 문화혁명가, 한창기 선생이 수집한 전통공예품이 있다. 고흥두원 <갑재민속전시관>에는 갑재선생이 수집한 남도의 민속생활품이 있는 셈이다.
서울에는 나를 주늑 들게한 조선일보 主筆 조갑제 선생이 있다면, 고흥에는 이갑재 선생이 있는 셈이다. 그렇게 이름을 연상하면 늙어가는 뇌가 까먹지도 읺는다.

두원면 갑재민속전시관에서

학창시절 시골집과 추억의 학교 교실도 재연해 놓았다. 그곳에서 나는 두원소를 또 만났다.
여의도에서 봤던 근면과 인내로 생을 살아온 두원소, 황소를 고향에서 또 만났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교가도 부르며 남파랑길을 싸목싸목 소처럼 걷는다.
그때 그사람들은 오데갔나~ 갯벌에 짱뚱이 짱띵이도 따라서 뛰어간다.

그게 우리네 부모였다.
그게 나였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였어~

반도끝 갯바람에 닭아진 질펀한 두원 갯뻘밭
두원 땅 넓은 벌에 펼쳐진 우리~(1절)
반도끝 갯바람에 닭아진 두원~(2절)
근면과 인내로 이루어 보세~
고흥 두원면 갑재민속전시관에서
밭갈이 하는 두원소
이문세, 그게 나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