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왕실에서 마셨던 최고급 차(茶)가 있다. 찻잎을 따서 맷돌로 갈아 참숯불로 우려낸 차가 있다. 고려에서는 금값보다 비쌌고 17세기 네덜란드 튤립🌷가격만큼이나 가격이 폭등했던 차가 있다. 바로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이다. 뇌원차 다음으로 비싼 차가 대차(大茶)였다.
오늘에는 잊혀진 차이지만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뇌원차를 복원하려고 최근에 학술대회까지 열리고 있다. 그리고 뇌원차의 생산하는 곳이 유일(唯一), 오직 하나였다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학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오늘에 녹차 하면 보성녹차밭이다. 보성군은 2023년 보성녹차 EXPO에서 왕궁에 하사하고 송나라에 까지 수출했던 뇌원차 진상행렬을 재현했다. 고려청자의 명성에 버금가는 차가 고려의 뇌원차였다.
찻잎을 어떻게 산화하고 발효하느냐에 따라 녹차부터 흑차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오늘에, '시간 되시죠'라고 물어볼 때 '차 한잔 하시죠'라고 물어본다. 그만큼 오늘에는 차가 대중화 됐다. 고려시대에 차는 왕실이나 귀족이 마시는 음료였다.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의 연등회나 팔관회 때 외국사신에게 선물했던 최고급 차였다. 그 뇌원차를 오늘날 불교계와 학계에서 복원하려고 학술대회까지 열고 있다. 특히 조계종과 함께 불교의 2대 주류인 천대종파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뇌원차 복원과 재현에 <천태지관차> 라는 종파이름까지 붙이고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녹차로 유명한 보성군에서는 차를 고급화하려고 뇌원차 제다(製茶) 교육까지 하고 있다. 뇌원차는 콩(豆)을 가는 맷돌로 찻잎을 갈아서 숯불에 우려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불교계나 학계에서 뇌원차를 제조했던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곳이 내고향 고흥군 두원면(豆原面) 성두리(城頭里) 차수(茶樹)마을이라는 근거를 찾아냈다.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뇌원차에 대해 여러 글이나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무릎을 탁 쳤다.
어~저게 우리 시골마을 茶樹마을인데...!!!
그리고 뇌원차의 유일한 생산지가 왜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였는지 근거를 제시해본다. 불교계와 학계에서 밝히지 못한 몇 가지 근거를 나열해 본다.
■ 첫째, 뇌원차는 地名에서 이름 지어졌다.
뇌원차의 이름은 지명으로부터 따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내 여러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그중에서 2022년 9월 21일 자 <불교닷컴>에 나온 기사를 인용해 본다.
허흥식 교수는 고려사를 깊이 연구한 서울대 前 사학과 교수이며, 최정간 선생은 도예와 차문화 연구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다.
■ 둘째, 뇌원차의 뇌는 城머리 지명에서 따왔다.
뇌원차 원은 두원면 지명 原에서, 뇌는 성두리 지명 頭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차에 대하여 시리즈로 연재한 세계일보 <박정진의 차맥> 2012년 5월 17일 자 칼럼내용이다.
신문에는 뇌원의 뇌와 두원의 두자가 발음과 의미가 비슷하다고 적혀있다. 두원면은 머리 두(頭) 자가 아닌 콩 두(豆) 자를 쓴다.
내가 보기에는, 뇌원의 原자는 두원의 原자에서 따왔고, 뇌자는 뇌원자가 생산되었던 두원면 성두리(城頭里)의 頭자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예부터 성두리의 성두는 성머리, 성멀로 불리여 왔다. 그 성두리에는 고려의 두원현의 중심 관청인 현치성(縣治城)이 있었다. 고려의 현치성 인근지역에서 지방군사들이 농사도 짓고 차도 길렀을 것이다.
■ 셋째, 두원면 성두리에는 차수(茶樹) 마을이 있다.
전라남도 지역이 뇌원차의 유일한 생산지였다는 것은 이미 여러 문헌에 나와있다. 그리고 마을이름을 차나무, 차수(茶樹)라 불렸던 곳은 두원면 성두리 차수마을이 유일하다. 두원면지(誌)에 차수마을 지명 유래를 올려본다.
더불어, 차수마을에는 차등(茶嶝)이 있다는 것도 두원면지(誌)에서 확인했다. 보성녹차밭을 보더라도 차는 비스듬한 야산 기슭 등(嶝)에서 자란다. 차수마을 城머리 당앞이라 불리던 곳에는 토기와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그렇게 구전(口傳)으로 전해온다고 두원면지(誌)에 기록되어있다. 여러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오는 구전이 한두사람의 기록문헌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차나무 산기슭에서 흘러내려오는 물, 마르지 않는 샘물을 아기울음을 딴 응애샘이라 부른 것도 흥미롭다.
■ 넷째, 뇌원은 노원에서 딴 이름이다.
뇌원이라는 이름을 두원이나 성두리 지명에서 딴 것이 아니라, 노원이 변음돼 뇌원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뇌원차 이름의 발상지는 두원면이다.
《보성 차밭 밑엔 특별한 차문화가 있다》의 저자 조석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다소(茶所)와 지명(地名)을 연구하면서 따져보니까
뇌원(腦原)은 노원(蘆原)에서 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바로 그거네다. 고흥군 두원면은 백제시대에는 두힐현으로 불리웠고 고려시대에는 노원현이였다. 백제에는 두힐현이라는 똑같은 지명이 있다. 견훤과 왕건이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던 나주(會津城)에도 두힐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언덕을 뜻하는 <힐>에 의미가 영어의 힐(Hill)과 같다는 것은, 일부 언어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사하게 발음되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촘스키에게 물어 볼일이다.
하여간, 통일신라 때 두원면은 갈대 노(蘆)와 들판ㆍ언덕원(原) 자를 쓰는 노원현(蘆原縣)이었다. 조석현 지명연구가의 말대로 두원면은 갈대밭이 있던 땅, 노원이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두원현은 보성군 소속이였다. 고려시대 뇌원차ㆍ보성차(茶)는 두원차였던 셈이다.
두원면(노원현) 성두리에는 순천만습지 갈대처럼 갈대가 자라기 좋은 천혜의 질퍽한 뻘, 성두리 뒷개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이보다 더 질퍽한 뻘이 있음 나와보라 할 정도로 질퍽하다.
두원면 성두리가 뇌원차 생산지가 맞다면,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두원면 성두리에서는 고려 최고품질의 王에게 진상하던 茶가 생산되었고, 맞은편 남양면 우도(牛竹島)에서는 조선최고 품질의 王이 쓰던 화살의 대통, 전죽(箭竹) 신우대(시누대)가 생산됐다. 지형을 보아도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내륙이 감싸고 있어 茶와 竹이 자라기 안성맞춤이다. 지도에서 830이라 적혀진 곳이 두원면 성두리이다.
■ 다섯째, 뇌원차는 왜 맷돌로 갈까?
뇌원차는 맷돌로 갈아서 숯불에 우려낸 차다. 왜 하필 차를 맷돌에 갈았을까? 맷돌은 콩(豆)을 가는데 쓰는 기구이다. 왜 두원을 콩 심는데 콩 나는 고실고실한 땅 금반옥저(金盤玉箸)의 땅이라 했는가. 김영랑 이후 남도서정詩의 맥을 잇는 두원生 송수권 시인은 <소반다듬이> 詩를 지었는가.
■ 여섯째, 참나무숯불과 참나무골(眞木)
뭐든 참나무 숯불 참숯에 구어야 제맛이다. 뇌원차는 맷돌로 갈아서 숯불에 우려낸 차다. 차등에서 자란 찻잎을 따 두원콩을 갈던 맷돌로 갈고 성두리 차수마을 옆 마을 진목(眞木) 마을에 참나무 참숯으로 우려낸 차가 바로 고려왕실에 진상된 뇌원차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나의 탯줄이 묻힌 탯줄터 고향이 참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眞木마을이다.
■ 일곱째 두원면 고려청자 가마터
고흥에는 분청문화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이 있는 두원면 운대리에는 고려청자와 조선 분청사기를 만든 가마터 수십 곳이 있다.
두원면 성두리 차수와 진목마을에서 茶를 재배하였다.
차나무등(嶝)이라 불리던 차수마을과 참나무(嶝)이라 불리던 진목마을에서 차를 재배해고 참숯불로 우려냈다. 그리고 두원면 인근 운대리 가마터에서 만든 고려청자 차잔이나 차 그릇과 함께 왕실에 진상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두원면지(誌)에는 다음과 같이 그날의 흔적이 기록됐다.
두원면에는 고려청자 가마터가 5곳 발견됐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1호가 청자조각들의 반출량이 가장 많아 이곳에서 제작된 청자의 이해가 어느정도 가능하나...
오늘에 이르러 茶재배와 茶문화를 선도하는 고장은 보성군이다. 고흥군 두원면과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보성군 웅치면 약산마을이 있다. 이곳 약산마을에서 뇌원차를 복원한다고 하니 응원할 일이다. 두원면 성두리 차수마을은 1943년 12월 23일에 두원운석이 떨어진 마을이기도 하다.
서울대 이민성 교수가 공식적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학계에서는 두원운석을 일본사람(교장)이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기록하고 떨어진 곳도 두원면 성두리가 아닌 운대리로 기록했다. 다시 한번 서울대 교수가 성두리에 내려와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수율촌 밤나무 골에는 조선시대 버거운 세금을 이기지 못해 백성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오늘에 차수마을 차등에도 茶는 없다. 고실고실한 두원땅 넓은 벌에는 유자나무와 콩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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