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고흥여행

나는 남도에서 독도 여행을 한다 ; 獨島와 독섬

고흥돌문어 2024. 9. 1. 17:51

광주 5ㆍ18이 소재인 영화《화려한 휴가》를 보면 이런 오프닝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부대원이 소대장에게 北으로 가는 거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한 대원이 말한다.

화려한휴가, 오프닝 씬
"왼쪽에서 뜨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으로 가고 있습니다"

南으로 가는데 해가 왼쪽에서 뜬다는 것은 무슨 암시일까? 왼쪽은 서쪽일까? 화려한 휴가를 남쪽으로 떠나는데 주연 이름이 김 '상경' 이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세상에 또 있다.
나는 2024년 여름휴가로 독도여행을 했다. 동쪽 울릉도로 갔다고? 아니다. 南으로 窓을 내러 남쪽 고흥 거금도 오천항으로 갔다. 남도 고흥에서 독도를 보았다.

고흥에는 독도가 몇 군데 있다. 나는 거금도에서 독도를 보았다. 거금도에도 독도가 있다니, 거금도生 김일 프로레슬러에게 박치기 한방 맞은 기분이다.

거금도 오천항에서 바라본 독도

그리고 고흥문화원을 찾아 숨겨진 보물같은 책을 원장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제목이 創意도 아닌 광대 倡에 옳을 義를 쓰는 倡義는 어떤 의미일까? 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이 책의 10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울릉도를 개척한 고흥인 독도를 이름 짓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도는 우리 땅인가 전라도땅인가 고흥땅인가? ^^ 이름이 갖는 중요성은 김춘수의 <꽃>詩에 담겼다. 글로벌 페이스북이 실명(단일자아)을 써야 하는 이유에도 담겼다.

이름에는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가 있다. 독도의 이름에는 한국의 역사와 미래 그리고 오늘의 사람, 나아가 자아(我)가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고 글을 써본다. 독도가 주는 의미가 남도와 나에게 주는 미래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면 과거의 역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울릉도 감찰일기

1881년~1882년 울릉도 감찰사 이규원이 작성한 울릉도 지역백과사전이다.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나무를 베어간다는 소식에 고종이 감찰사로 파견한 이규원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일기로 기록한 자료이다. 고흥문화원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고흥문화원자료

《울릉도감찰일기》를 설명하는 네이버자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네이버 자료에서 옮김

흥양 초도사람들? 흥양은 고흥의 옛 지명이다. 초도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거금도(금산면), 시산도, 무학도, 손죽도를 지나면 나오는 사진 아래쪽에 초도가 나온다.

고흥문화원 자료에 1882년에 울릉도에 고흥生 94명이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출신지역을 고흥에 있는 섬별로 <울릉도감찰일기>에 기록했다는 것은 자료의 신빙성을 더 높여준다. 울릉도 학포에 거문도 사람 24명, 도동에 14명은 거금도를 거문도로 기자가 헛갈려 誤記한 것 같다. 오기가 아니더라도 1895년 거문도가 돌산군(현 여수)으로 편입되기 이전, <울릉도감찰일기>를 썼던 1882년에는 거문도는 흥양(고흥)군 소속이었다.  

신문기사에서 옮김

이러한 자료를 보더라도, 전라도 출생 115명이 울릉도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규원이나 고종의 史觀 의해 왜곡되지 않았다면, 세기의 명저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도 아닌 존재한 사실(Fact) 그 자체이다.

돌을 독이라 했다.
1) 나는 어려서 고향 고흥에서 돌을 독이라 불렀다. 돌로 돌을 치며 하는 비석치기ㆍ비사치기 놀이를 독치기라 불렀다. 아버지는 벽(베림박)을  쌓을 때, '어이~독 좀 가져와 보소~'라 말씀하셨다.
2) 우리문화가꾸기회 이훈석 상임이사를 소개한 신문기사가 증언한다.

고흥 앞바다에 있는 '독섬ㆍ독도ㆍ석도가 증언합니다.
한겨레신문 기사, 2017년 8월21일

섬은 왜 홀로섬 獨島가 되었는가?
독도는 1900년도 부터 독도라 부르기 전까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오늘의 한국인이 부르는 독도라는 이름은 1900년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이름을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칙령에는 '울릉도에 부속된 석도를 조선의 고유 영토라 한다'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여름휴가 때 고흥 牛島를 갔다. 우도의 원래 이름은 소섬, 쇠섬이었다. 사대주의인가? 아니면 글(文)을 알고 모르고에 따라 양반과 쌍놈을 구분하는 양반계층문화 때문인가? 그렇게 漢字를 좋아하는 韓國人 누군가에 의해 우리말 돌(독)은 漢字로 표기됐다. 돌섬ㆍ독섬도 비껴갈 수 없었다.

고흥에서 내가 직접 들은 사실로 독섬이 왜 독도가 되었는지 그날의 기록물과 내가 직접 보고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독섬(돌섬)이 왜 獨島가 되었는지 적어본다.

1) 고흥生 갯사람 울릉도 거주인이 돌(바위) 로 된 섬을 보고 독섬이라 불렀다.
2) 울릉도를 시찰한 이규원이 돌섬(독섬)을 돌에 섬자를 石島라  文으로 옮겼다.
3) 그리고 울릉도감찰일지에 石島라 적었다.  

그 후로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의 영향으로 한자어 石島는 돌섬ㆍ독섬으로 불리어 왔다. 그리고 다시 지배권력 누군가에 의해 독섬은 한자를 다시 사용해 독도로 바뀌는 과정에서, 독섬의 섬은 섬島자를 사용하였다. 독은 돌에서 유래한 역사ㆍ倡義는 잊힌 채, 借字表記法, 한자차용표기법이라고도 하는 語法에 의해 변형됐다.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기록하는 표기법에 의해 돌(독~)은 잊힌 채 홀로 있는 섬이니 홀로 독獨을 漢字에서 차용했다. 고로, 獨島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인이 독도에 대하여 표상하는 (바위)의 위풍당당한 강인기상은 잊힌 채 무관심과 사대주의로 독도라 불리며...
🎵  저멀리 외로운섬~홀로 아리랑~
그렇게 아이들에게 불리고 기억되며...
독섬(돌섬)은 오늘도 홀로 쓸쓸히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있다.

탈북 아이들과 이승철 콘서트

“고흥 앞바다에 있는 ‘독섬·독도·석도’가 증언합니다”

【짬】 우리문화가꾸기회 이훈석 상임이사 “4월20일 새벽 5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직 미명인데 무슨 전화일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남 고흥 봉래면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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