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고흥여행

돌文語칼럼 ; 고흥사람 이사람~송영길

고흥돌문어 2024. 12. 7. 12:45

내가 이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여의도 목욕탕에서다. 탕에서 벌거벗고 둘 모두 피곤한 기색으로 서로 알몸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고흥대서면 나는 고흥 두원면에서 태어났다. 대서면은 득량만 대전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두원면과 南北으로 마주 보고 있는 면(面)이다.

고흥군 북서부, 득량만 쪽

어려서 두원 대전해수욕장으로 소풍 가던 날, 바다 건너 보이는 저 땅은 어디지? 현해탄 넘어 대마도나 삼팔선 넘어 북한땅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그 바다 건너 땅처럼, 그날에 목욕탕 물에서 만난 그도 같은 고흥사람이어도 나에게는 가깝고도 먼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동향이지만 가는 길이 달랐다. 그는 광주로 나는 순천으로 고등학교를 갔다. 그는 신촌골로 가서 독수리가 됐고, 나는 안암골로 가서 호랭이가 됐다.
그는 남도 아버지들의 바람처럼 행정학과를 갔고, 호로자석(?)인 나는 법대나 행정학과 가서 고시 보라는 아버지를 눈속임하고 이삔 텔렌트 아나운서들 보려고 신방과를 갔다.

그는 신촌골에서 학생회장이 돼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나는 가끔 안암골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고 미팅이나 하며 방황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돼 서여의도에 입성했고 나는 돌고 돌아 서여의도 국회옆 신용평가회사 신입사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리고 2004년 그날이었다.
서여의도 목욕탕에서 온탕에서 벌거벗고 서로 마주 앉은 체 서로 고흥사람 인 줄도 모르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두원면과 대서면 사이에 있는 대전해수욕장 바닷물처럼 따순 물을 사이에 두고 그는 북쪽에 나는 남쪽에 탕 깊숙이 알몸을 넣고 서로 마주 봤다. 눈만 빼꼼빼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났다.
그와 나는 온탕 냉탕을 오가며 여의도에서 마주쳤다. 그는 계엄군을 몸으로 막고 계엄군을 설득하고 있었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라 그 누가 말했던가, 문재인 정부 때 사람들이 운동권이 문제 많다는 뒷담화에 나도 반론을 못했으니 동조한 셈이다. 몇 년이나 권력을 잡았기에 가진자들이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니 배가 아팠을까, 사람들이 운동권 운동권 하길래 나도 그 말에 동조한 때도 있었다. 운동권과 운동꾼은 구별했어야 했는데 후회하고 후회된다. 자기혁명이 없는 운동꾼과 자기혁명이 있는 운동권은 구별해야 한다. 뼈저리게 이 아침에 자기 반성해 본다.

재동서원 = 송간의 사당, 대서면

계유정난 후 그날에 단종의 비(妃) 여산송 씨와 송간의 자손 들은 울분을 토하고 고흥으로 내려왔다.
생육신 김시습과 뜻을 같이하여 재동서원은 김시습도 배려하여 함께 배양하고 있다.
임진왜란 그날에 그의 여산송 씨 문중에  송희립ㆍ송정립ㆍ송대립은 모두 전장에 나갔다. 송희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끝까지 보좌하며 노량에서 죽는 날까지 장군을 옆에서 지켰다. 이순신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희립에게 전했다. 장군이 죽고 난 후 희립은 장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눈물을 머금고 왜군을 막아섰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노량해전

그날에 송희립 고흥사람은 이순신의 분신과도 같았다. 모든 공(功)을 장군에게 양보하고 장군을 끝까지 보필했다. 아름다움을 오이(자식)에게 양보한 남도産 오이꽃(부모님)과도 같았다. 다 고만고만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뒤에서 꼴등한 너가 있었으니 내가 일등을 했다는 《눈물꽃 소년》고흥사람 박노해 시인의 마음과도 같았다.

오늘에 여산 송씨 후손 그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자신의 인천 지역구를 이재명 대표에게 양보했다. 회한의 몇 년을 뒤로하고 저렇게 국회에서 눈물을 머금고 있다. 계엄군을 막아서고 올부짖고 있다. 절규다.
그와 나의 학창시절 거리에 최루탄이 휘달리던 그날에 연설했던 그의 모습도 보인다. 남도 장인(匠人)들이 만들었던 거북선 판옥선을 만든 남도에서 자란 소나무처럼 보인다. 남도의 선산을 지킨 부모님들 등굽은 소나무처럼 보인다. 그는 소나무당 대표다.

계엄군을 몸으로 막고 설득하는 송영길 대표
윤석열탄핵 여의도 집회에서

다시 새날이 온다면, 행동은 하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운동권이 어쩌고 저쩌고 다짜고짜 비판만 하면...
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이렇게 말해야겠다.

"윤석열이 계엄 선포한 그날에 그럼 뭐 하셨나요?
황당은 하지만, 혹시나 총 맞을까 봐 나처럼 아내가 말려서 여의도에 무서워서 가지 못하고 구경만 하지 않았나요?"

부끄러움을 느낀다. 밥상 차리는 사람 있고 밥 먹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인가?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수 없이 봐왔다. 밥상을 차릴 때는 내 눈으로 없는 걸 분명히 봤는데 밥 먹을 때는 다들 나도 밥상 차렸다고 하는 것을 수 없이 봐왔다.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고 누가 잘되면 또 시기와 질투를 한다. 앞으로는 다양성 다양성 하면서 뒤로는 모나면 정(丁)으로 치려한 습성도 수없이 봤다.

그와 나는 달랐다. 그는 장군들 격군들처럼 덩치가 컸고 나는 왜군처럼 덩치가 작다.
하지만 그와 나는 같은 곳이 하나 있다. 2024년 12월 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있다는 것은 같다. 고흥사람 그와 내가 같다.
최소한 오늘 만은 같다.
그와 나는 촌스럽다.
촌스러움의 미학 첫번째는 고향이 일러준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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